2024.04.26 (금)

[장편소설] 흙의 소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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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4

  • 특집부
  • 등록 2020.10.01 07:30
  • 조회수 661

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3>

 

너무나 생생하였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도무지 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여막을 나와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산길을 허위허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꼽도 떼지 않았다. 흐트러져 있는 상투도 그렇고 의복도 제대로 차리지 않은 채였다. 산을 내려와서는 마구 달리기 시작하였다. 당재라면 2십리가 넘는 길이다. 옥천군 이원 동이면에 접한 지금의 길현리로 산 넘고 물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우선 강을 건너야 했다. 날근이 나루터에서 혼자 배를 탔다. 사공이 투덜거려 그가 노를 잡고 젓기 시작하였다.

"배삯을 말하는 기 아니고

"뭐라요? 그럼.”

"원 꿈을 가지고, 사람 일도 아니고 말이여.”

마수걸이에 혼자 배를 띄우는 것에 대해 따지는 것이 아니고 꿈자리를 가지고 젊은이가 헐떡거리는 것이 답답하고 그것도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시묘살이를 끝도 없이 계속하고 있는 이름난 효자인데다가 사간원 홍문관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이조판서吏曹判書(사후 추증追贈) 박천석朴天錫의 귀동 아들이 아닌가. 삯이야 수곡으로 받으면 되지만 도무지 새벽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박연은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딴 소리만 하였다.

"빤히 바라보이는데 왜 이리 멀어요.”

그리고 노를 사공에게 쥐어주며 허리춤에 끼어 있던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새벽 강을 거슬러 간드러지게 울려 퍼지는 가락은 아련하게 수면 위를 춤추는 듯 안개 속을 가르고 있었다.

사공은 푸념 대신 한 곡조 더 신청을 하는 것이었다.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도 장단이 되었다.

박연은 배가 나루에 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개펄에 뛰어 내려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다시 뛰었다.

산속인가, 들판인가, 뛰면서 호랑이의 소재를 생각했다. 산 고개를 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재에 당도했을 때 과연 꿈이 아닌 사태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 웅성대고 있었다.

맞았다. 호랑이를 앞에 두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녀석이 틀림없었다.

박연은 허겁지겁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모두들 땀을 철철 흘리며 나서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아아니?”

도대체 누군데 남의 동네 일에 참견이냐고 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냐는 얘기였다. 사람들 중에는 효자로 이름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맞네 맞아.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여?”

박연은 아랑곳없이 호랑이의 목덜미를 쓸어안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몇 년 부모님 시묘살이를 같이 한 녀석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한 채 눈물부터 나왔다.

 

흙의소리4차-2.JPG
작화:이무성

 

"아이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여?”

방금 함정에서 끌어올렸다는 호랑이는 척 널부러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떠 봐. 얼른. 왜 이러고 있는 기라?”

난데없이 출현하여 낯선 젊은이가 하는 행동에 대하여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박연은 이제 호랑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으며 땅을 치고 있었다. 호랑이는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는 도리가 없는 현실을 인정하여야 했다. 슬픔이 복받치고 가슴이 꽉 메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라요?”

마을 사람들을 원망하다가 또 호랑이를 원망하다가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당장 그가 해야 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박연은 제대로 차려 입지도 않은 옷깃을 여미고 정중한 어투로 인사를 하였다.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아버지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대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박시용朴時庸은 성균관 직강直講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의 직에 있었고 작은 아버지 박천귀朴天貴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밀양박씨 그리고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안 사람들도 있는 터여서 그를 알아보았다. 여기 누운 호랑이와의 관계도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호랑이를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엎드려 빌며 간절히 청하였다.

호랑이 고기 맛을 보겠다고 입을 다시던 군중들, 쓸개는 어떻게 하고 가죽은 어떻게 하고 장택을 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하였지만 마을 어른들은 어허 으음 큰 기침을 하며 눈빛을 맞추었다. 그리고 박연의 효심과 짐승과의 감동적인 인연을 가상히 여겨 호랑이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양반고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의 입김이 세었다.

박연은 죽은 호랑이를 아버지 어머니 묘소로 둘러메고 와서 정성을 다해 묻어주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고 훗날까지 문중에서 어머니 제삿날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었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대로 박연의 묘 앞 왼쪽에 의호총을 써 놓아 함께 명계冥界를 지내고 있다. 피리 소리는 난계 국악제로 대신하면 되었다.